이유 (1645년)

이유
李濡
출생1645년
사망1721년
성별남성
국적조선
경력설서, 가주서, 사서, 정언, 문학, 지평, 교리, 수찬, 부수찬, 부교리, 문례관, 검토관, 시독관, 헌납, 이조좌랑, 응교, 집의, 부응교, 사간, 참찬관, 승지, 목사, 참의, 경상도관찰사, 강양도관찰사, 좌부승지, 전라도관찰사, 대사간, 승지, 평안도관찰사, 도승지, 대사간, 부사직, 부제조, 도승지, 대사헌, 한성부좌윤, 예조참판, 동지사, 대사헌, 호조판서, 제조, 형조판서, 병조판서, 지경연사, 대사헌, 이조판서, 금위영제조, 약방제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직업문신
상훈혜정공(惠定公)
기사계첩》에 실린 영중추부사 이유

이유(李濡, 1645년 ~ 1721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시호는 혜정공(惠定公)이다. 세조금성대군의 형제인 광평대군의 후손이다. 북한산성을 수축하였다.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와 가주서, 사서, 정언, 문학, 지평, 교리, 수찬, 부수찬, 부교리, 문례관, 검토관, 시독관, 헌납, 이조좌랑, 응교, 집의, 부응교, 사간, 참찬관 등 청요직과 옥당, 대간직을 두루 거쳤고, 이후 승지를 하다 외직인 목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참의를 한 뒤 경상도관찰사와 강양도관찰사를 한다. 이후 좌부승지, 전라도관찰사, 대사간, 승지를 거쳐 평안도관찰사와 도승지, 대사간을 두루 했고, 이후 부사직과 부제조, 도승지대사헌을 한 뒤, 한성부좌윤과 예조참판, 동지사와 대사헌을 거쳐 호조판서, 제조, 형조판서, 병조판서, 지경연사, 대사헌, 이조판서, 금위영제조, 약방제조를 두루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거쳐서 영의정이 된다. 뒤에 판중추부사를 거쳐 영중추부사가 된다.[1]

각주

  1. 정만조 (1997). “이유(李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1년 4월 24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