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제후
선제후(라틴어: Princeps Elector 프린켑스 엘렉토르[*], 독일어: Kurfürst 쿠르퓌르스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정하는 역할을 하였던 신성로마제국의 선거인단이다. 선거후라고도 한다. 선제후는 백작, 공작 그리고 대공과 같이 대단히 높은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위계상 신성로마제국의 봉건 제후들 가운데 왕 또는 황제 다음으로 높았다.
개요
서양식 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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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라토르 /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바실레프스 / 아프토크라토르 / 카이저 / 차르 |
렉스 / 바실레우스 / 코눙그 / 차르 |
그랜드 듀크 / 그랜드 프린스 / 아치듀크 벨리키 크냐지 |
듀크 / 프린스 / 헤어초크 / 크냐지 터워소그 / 데스포티스 / 쿠르퓌르스트 |
마르키 / 퓌르스트 / 마르크그라프 란트그라프 / 팔츠그라프 / 보이보드 |
카운트 / 그라프 / 얼 / 야를 / 에알도르만 |
바이카운트 / 부르크그라프 / 카스텔란 |
바롱 / 프라이헤어 / 리코스 옴브레스 / 보야르 |
바로넷 / 헤레디터리 나이트 |
에퀴테스 / 나이트 / 데임 / 슈발리에 / 리터 에델프레이 / 야를 / 드루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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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은 원칙적으로는 선거로 군주를 뽑는 규정을 갖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15세기까지 줄곧 대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 출신의 서거한 선대 황제의 아들 가운데 맏이가 무난히 제위를 물려받았다. 이처럼 대개 선거라는 게 형식에 불과하였음에도, 선거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제위를 합법적으로 상속받지 못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선거를 통하지 않은 군주는 그 스스로 ‘황제’라 칭할 수 없었다.
그런데 형식적으로 선제후들이 갖춘 게 황제 선거권이 아닌 독일왕의 선거권일 뿐이었다(그 때문에 선제후가 아닌 선정후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사실상 독일의 왕이 곧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교황의 공식적인 추대가 없으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불리지 않았으며, 추대 전까지는 로마왕이라고 불렀다. 덧붙여 카를 5세는 교황이 직접 왕관을 씌워 준 마지막 황제였으며, 이후로는 오직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만이 황제가 되었다(독일어: erwählter Römischer Kaiser; 라틴어: electus Romanorum imperator).
그러나 제국의 제후들 가운데 선제후에 속하는 자들은 선출권 외에도 그들의 선제후라는 직함과 관련하여 달리 또 특권을 갖는 것은 허가되지 않았다. 비록 원칙적으로 귀족의 직위는 없었지만(요컨대 공작, 변경백 또는 궁중백 등 봉건제도상의 직함을 추가로 소지했다) 선제후로서의 위치는 매우 막강하였다.
황제 선거는 1198년부터 1806년까지 행해졌다. 1198년, 독일 왕권을 둘러싸고 내전이 격화되는 것을 염려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하여, 라인강 유역의 네 명의 선제후들, 즉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 궁중백의 동의 없이는 왕위에 오를 수 없다고 정하였다. 1257년부터는 앞의 네 명과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까지 합쳐 총 여섯 명이 선제후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1289년에는 보헤미아 국왕까지 더해져 총 일곱 명이 되었다. 1356년에 카를 4세가 반포한 금인칙서에 따라 7선제후 제도와 다수결제가 법적으로 확정되었다. 덧붙여 라인 궁중백의 선거권은 바이에른 공작과 교대로 행사되었다.
구성
각주
- ↑ 기쿠치 요시오, 『결코 사라지지 않는 로마, 신성로마제국』, 다른세상, 2010, 245쪽.